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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니우스 로키(Genius Loci), 당신과 섬의 이야기

1) 


​* 2024년 두 차례 열린 강지웅의 개인전  《Here Be Dragons》, 《Even hope decays... 희망조차도 부식하다니》와 연계하여 발행된 도록 『다리와 날개, 이상한 모랫빛 눈』(2024, 프레스 프레스)에 수록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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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

           당신은 폭이 좁은 문을 열고 어두운 지하로 내려간다. 컴컴한 계단을 지나 맞이한 공간에는 드문드문 미광의 조명이 드리워져 있고, 수수께끼 같은 형상의 이미지들이 어슴푸레 보인다. 이들은 주로 벽에 박힌 작은 나사에 다소 납작한 몸을 의지하거나, 벽과 바닥이 맞닿는 곳에 기울어진 모습으로 한 뼘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정확히는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슷한 모양새로 몸을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표면에 달라붙은 무수한 입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작은 알갱이들은 조명을 받아 반짝이면서도 그 사이로 가려진 허름한 이미지를 간신히 드러낸다. 유추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고, 다만 이들이 무언가의 흔적 – 어떤 현상이나 실체 뒤에 남은 자취 – 일 것임을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무엇에 대한 흔적인가? 당신이 이곳, 또는 이곳을 일시적으로 점거한 사람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다시 어두운 계단을 올라 좁은 문을 열고 나간다면, 질문의 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는 수 없이 공간의 한 켠에 놓여 있던 종이 한 장을 들여다본다. “사진이라는 매체”, “섬돌모루”, “시간의 흐름”, “전두환 정권 시절”, “휴양지”, “갯벌”, “모래가 자국을 남긴다”… 따위의 단어와 문장들. 이제 당신은 이미지와 입자의 기원에 존재하는 몇 가지 단서들을 획득했고, 의문은 자연스레 풀렸다. 더이상의 노력은 불필요하기에, 당신은 당신이 본 것이 ‘전두환 정권시절 휴양지로 개발되었던 무인도 섬돌모루’를 찍은 사진(이었던 것)이며, 그 위를 뒤덮고 있던 입자는 ‘사진이 노출된 섬돌모루의 갯벌’에서 온 것임을 확인한 뒤 이곳을 떠난다. 마침내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섬돌모루를 아는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 된다.

 

섬돌모루로

           여기까지 읽었을 때, 당신은 이 글로 하여금 당신 역시 섬돌모루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어딘가에 있을 무인도, 개발이 중단된 채 폐허로 남겨진 섬돌모루를 상상하며 계속해서 글을 읽는다. 작가는 잊혀진 장소의 과거를 들춰내 현재에 불러옴으로써, 또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장소의 현재를 기록함으로써 그곳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키고자 했던 걸까? 그렇다면 반은 성공했다. 나도, 당신도 외딴 섬의 존재를 부지불식간에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사진 속에서 기억할 만한 것이 있었나? 애초에 당신이 본 것이 섬돌모루를 찍은 사진이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당신에게 남은 것은 “…에 섬돌모루라는 무인도가 있(었)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와 애써 연상해낸 섬의 이미지일 테다. 작가는 과연 실패한 것일까? 그렇다기에 그는 최후의 이미지가 될지도 모를 사진을 취약한 환경에 방치하며 의도적인 손상을 가했다.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게 인화된 사진을 해변에 들고 가 축축한 파도와 바닷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도록 했다. 사진의 보존과 재생산을 위한 모든 행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남겨진 이미지의 생이 섬의 운명보다 길게,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믿음조차 무너뜨리며. 이 계획적인 실패를 통해 얻어낸 이미지는 어느 정도의 통제와 무수한 우연을 거쳐 지하 전시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이곳에 오기 전, 그러니까 이미지를 지시하는 캡션에 ‘sea mud stains on photograph’라는 수식이 따라붙기 전, 전생과도 같았던 이미지의 과거를 잠시 꺼내와야겠다. 작가는 섬돌모루에 대한 소문 같은 이야기를 우연히 접했다. 당신, 또는 나와 다르게 그는 소문을 흘려 듣지 않았다. 고무보트를 사고, 몸소 항해에 나섰다. 그곳에서 접한 풍경과 서사는 가히 사진으로 남길만한 것이었다. 그는 고분을 파내는 도굴꾼처럼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섬의 매력적인 단면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비용을 들여 큰 크기와 고화질의 사진으로 인화한 뒤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플로럴 패턴을 가진 촌스러운 벽지와 커튼, 눅눅하게 빛이 바랜 매트리스, 뜯어진 천장, 말라 붙은 곤충, 낡은 지도. 섬돌모루로부터 파생된 말과 이미지는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섬돌모루를 재발견한 유일한 목격자이자 사진가로서 얻은 “알량한 권력”을 얼마간 누렸다.2)  그러나 이때의 사진이 보여준 것은 섬이 아닌 섬에서 사라지게 될 것들의 총합과도 같은 이미지였다. 그가 사진으로 남기고자 한 것 또한 섬이 아닌 섬의 ‘한 면’이었다. 시간 속에서 부스러질 사진의 요소들은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기만 했다. 반면 이후에 전개된 작업에서 그의 이미지는 붕괴된 것들이 의미했던 바를 다시금 부상시킨다.3)

 

           섬돌모루의 묘한 풍경은 그곳의 지리적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인공 폭포와 인공 호수, 서양식 레저타운 등 온갖 ‘인공물’에 의탁된 왜곡된 믿음에서 비롯한다. 어느 날 작가는 자신의 사진이 목놓아 외치는 과거의 ‘지금’이 이토록 일그러진 믿음의 얼굴과 닮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곤 곧장,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게 인화된 사진을 들고 해변으로 갔다. 지금 당신이 느끼는 기시감은 착각에 의한 것이 아니다.

다시 폐허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오래된 건물의 계단을 올라 열린 창과 뚫린 문이 마주보는 널따란 공간에 들어선다. 바닥에는 두어 달 전 어느 이미지의 표면에서 보았던 크고 작은 알갱이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발에 밟히고 쓸린 모양 그대로 여전히 어떤 흔적을 드러내며. 당신은 시선을 들어 커튼과 비슷한 형태로 천장과 창틀에 매달려 있는 얼룩진 천을 바라본다. 그곳으로 향하는 눈길에는 조각난 가죽과 돌덩이, 그물망, 정갈한 액자에 담긴 작은 이미지가 처연하게 놓여있다. 당신은 건조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각각에 새겨진 이미지를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선다. 몇몇 기계와 작가의 손을 거쳐 다른 ‘몸’ 위에 다른 방식으로 새겨진 이미지/텍스트들은 역시나 실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으로 당신을 맞이한다. 다만 공간 전체를 부유하는 흙먼지와 온전히 남아있는 황폐한 풍경 사진, “침잠하는 바닷가…”라는 제목의 텍스트가 가물가물해졌던 그 이름을 떠오르게 할 뿐이다.

           섬돌모루. “그야말로 폐허”인 그곳.4) 그곳에서 이미 허물어진 희망을 뒤로하고 무너진 잔재들은 고유의 과거를 가리키는 동시에 보편적인 미래를 암시한다. 누군가는 폐허가 “거기에 들어서는 자에게 이야기할 것을 요청”하며, 그럼에도 “폐허의 이야기는 감히 입으로 뱉어보기는 하지만 결코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일종의 ‘중얼거림’”이라 부연했다.5)  이 중얼거림에 귀 기울인 채 공간을 맴도는 유령 같은 현전을 지켜본다. 인간이 쌓아 올린 것들에 거역하는 힘으로써 밑으로 추락하는 알갱이들은 그곳과 이곳, 나와 당신, 이것과 저것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상기한다. 작가는 오래도록 존속했음에도 한 번도 맞닿지 않았던 것들의 피부를 맞대고, 문지르며 이미지를 새겼다. 같은 글을 수 차례 번역하고, 연약한 말소리가 공간에 울리는 하나의 사운드가 될 때까지 녹음과 재생을 반복했다. 변함없이 영원한 현재를 욕망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의 서글픈 끝을 예감하고 있다는 듯이. 그는 덧없는 것을 구제하지만 그것을 지겨울 정도로 영원화하지는 않는다.6)

이쯤에서 나는 게니우스 로키의 존재를 밝히려 한다. 섬돌모루와 이곳을 이으며 지금껏 – 지하로부터 섬돌모루로, 다시 폐허에 이르기까지 – 우리를 따라온 존재. 당신은 작가의 이미지와 그것들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같은 형태의 넋을 본다. 그것은 비록 영원히 영원할 수 없고 흔적이나 소문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의 과거와 미래에 자리한다. 뒤따르는 삶 속에서 나는 그 얼굴을 몇 번이고 마주할 것이다.

 

1) 고대 로마인들이 특정한 공간에 붙은 수호신, 일종의 터주신을 가리켜 붙인 이름. 도상학적으로는 코르누코피아(cornucopia)를 들고 있는 사람이나 뱀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1960년대 후반 노르웨이 건축가 노르베르그 슐츠(Norberg Schulz)가 ‘땅의 정신과 분위기’라는 말로 재해석해 사용한 바 있다.

2) 2024년 3월 6일 작가와 나눈 대화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인용한다.

3) 현재 작가의 작업을 ‘사진(이었던 것)’, 또는 ‘이미지’로 지칭하는 까닭이다. “역사가 드러나게 하려면 사진이 제공하는 단순한 표면적 연관성은 파괴되어야 한다. 예술작품에서는 대상의 의미가 공간현상이 된다면, 사진에서는 한 대상의 공간현상이 그 사진의 의미다. (…) 물론 예술도 시간 속에서 붕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부스러진 예술의 요소들에선 예술이 의미했던 것이 부상하는 반면, 사진은 그 요소들을 차곡차곡 쌓기만 한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김남시 역, 『과거의 문턱 – 사진에 관한 에세이』, 열화당, 2022, pp.30-36.

4) 「노트 (24.04.26)」.

5) 민주식, 「폐허의 미적경험: 이야기 없는 장소의 기억」, 『미학』 81권 1호, 2015, p.217.

6) 크라카우어, 앞의 책,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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