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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오픈 큐레이팅 Vol.34: 문자의 다양한 형태들
기호와 기호 그리기에 관한 주석


2024.09.27 - 10.26
DDP 갤러리 문

 

      손의 모양과 동작, 스치는 공간과 위치, 일시에 깜빡이는 눈과 들썩이는 눈썹,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 마주한 손과 얼굴의 크고 작은 변화가 하나의 단어로, 문장으로, 의미로 전달되는 언어가 있다. ‘손 수(手)’에 ‘말씀 어(語)’ 자를 써서 ‘수어’라 불리는 이 언어는 한국어와는 다른 고유의 형식을 지닌다. ‘보이는 언어’로서 수어는 농인들의 시각과 동작을 바탕으로 생겨난 유일하고 독립적인 언어다.1) 그러나 말소리로 전해지는 한국어가 시각화된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수어에는 아직 통일된 문자 체계가 부재하다.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가 바로 ‘Sign writing’, 수어문자의 활용이다.2)

   《DDP 오픈 큐레이팅 Vol.34: 문자의 다양한 형태들》은 정해진 틀과 구조를 기반으로 수어를 기록하는 수어문자에 주목하여, 이를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의 재료로 삼는다. 달리 말해 기존의 ‘타이포’가 가리키는 활자(type)의 자리에 수어를 두고, 수어문자를 그려 나간다(graphy). 레이아웃과 색상, 형태와 비율의 변주를 통해 개별 기호는 의미를 부연하는 복합 기호로, 말과 글의 최소 단위인 문장으로 파생된다. 이는 타이포그래피가 함유하는 기호학적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그 자체로 뜻을 지닌 언어기호-텍스트이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재현하는 시각기호-이미지인 ‘텍스트-이미지'를 생성하기 때문이다.3) 즉 본 전시는 읽을 수 있는 언어기호이자 볼 수 있는 시각기호로 기능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을 살피고 확장하는 데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 나아가 수어문자 내에서 텍스트와 이미지의 영역이 서로 관계 맺고 공존하며 의미를 생산하는 여정을 점층적으로 제시한다.

 

    <문자들>은 단순한 몸짓과 구분되는 수어가 시각적 기호 체계를 지닌 언어임을 보여준다.4) 사각형과 원, 화살표와 격자 형태 등으로 구성된 ‘문자들’은 여러 겹의 마주침을 경유하여 저마다의 뜻을 형성한다. 이때의 마주침은 완성된 결과물로 제시되기 보다 그 과정을 상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실크스크린 제판 위에 새겨진 문자들의 집합은 관객이 직접 바퀴를 굴려 밀고, 이동시키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문맥 안에 놓인다(<방법들>). 그리고 연결된 단어와 단어들이 모여 직조한 문장은 그래픽 요소가 더해진 텍스트-이미지로 나아간다(<단어들>, <문장들>). 수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손의 움직임 외에도, 억양과 같은 역할을 하는 얼굴 표정, 담화 참여자 사이에 자리하는 수어공간(sign space) 모두 문자 안팎에 존재하는 유형의 기호로 드러난다.5)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결속된 기호 관계 속에서, 들리지 않고 보이는 언어였던 수어는 비로소 보이지 않는 의미의 행간을 획득하게 된다.

     전시는 수어가 문자의 모양새를 갖추고 문장의 짜임을 갖기까지 지나온 궤적을 한 개의 시퀀스로 그려낸다. 수어문자가 수어의 기표와 기의를 시각화한 ‘일차기호’라면, 타이포그래피는 이를 또 다른 기표 삼아 함축된 기의와 결합한 ‘이차기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글은 “다양하게 조합되는 기호들의 길고 긴 연쇄”를 발생시키며 전시에서 다루어진 기호의 함의를 풀어보고자 했다.6) 수어를 타이포그래피의 새로운 재료로 삼은 이 전시가, 전시의 문턱에 놓인 이 글이, 또다른 기표가 되어 어딘가에 이르기를 바란다. 의미는 열려 있고,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거나 바깥으로 돌아서는 일은 마주한 사람의 몫에 놓여 있다.

 

1) 한국수화언어법 제1장 총칙 제3조.

2) 덴마크의 발레리 서튼(Valerie Sutton)이 1974년에 처음 발명한 수어문자는 미국, 호주,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체코수어사전에서는 수어문자를 사용하여 표제어를 표기한다. 최혜원, 이현화, 「대한민국 수어사전의 현황과 발전방향」, 『2018 국제학술대회: 보이는 언어의 기록, 수어사전』, 국립국어원, 2018, p.92

3) 송숙영, “이미지-텍스트 관계에서 본 동아시아 타이포그래피의 기호적 성격,”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참조. 

4) ‘문자’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의 언어를 적는데 사용하는 시각적인 기호 체계”이다.

5)  수어공간은 담화 참여자들 사이에서 생성되는 문법적인 공간이다. (…) 담화 참여자들이 수어공간의 한 특정 지점에 할당된 ‘보이지 않는 지시물(invisible referent)’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때, 그 수어공간은 문법 기능을 갖게 된다. 이영재, “한국수어의 공간 활용 연구,” 『국어문학』, (국어문학회, 2021), p.147.

6)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역, 『기호: 개념과 역사』, 열린책들, 2009,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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